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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숙이 누나

박산 2017. 8. 11. 10:26



금숙이 누나 -  


1963년 
서울 한강다리 노량진역 앞 
야트막한 산동네 

6.25 때 엄청난 폭격으로 
나무 한 그루조차 살지 못해 붙여진 이름 대머리산 
그 언덕배기 성황당 고개 넘는 길 푹 파인 골짜기 
녹슨 양철 지붕 집에 세 들어 사는 금숙이 누나는 양공주였다 

난 그때 양공주가 무언지 잘 몰랐다 
그냥 공주는 다 예쁘려니 했다 

종종 키가 이 만큼 큰 
용산 미군부대 사는 흑인 엠피가 집에 왔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비는 
항시 술에 취해 소리소리 지르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넷 인지 다섯인지 모를 그녀의 동생들은 
씨레이션 깡통 속 
닭고기 몇 점과 허쉬 초콜릿에 
입이 충만하여 그 움직임이 바빴다 

금숙이 누나 동생 내 친구 코흘리개 호태는 
씹어도 씹어도 질리지 않는 
미제 껌 하나 남겼다가 
딱지 구슬 부자였던 내게 줬다 

금숙이 누나는 미군 따라 미국에 갔고 
그 집 남매들도 줄줄이사탕으로 미국에 갔다 

사십 년이 훨씬 넘은 세월은 
바람을 타고 흔적 없이 지나갔지만 
그 집 소식은 
비행기 타고 온 누군가에 의해 내 귀로 전해졌다 

금숙이 누나는 그 미군과 이혼한 지 오래고 
동생들 몽땅 데리고 
그로서리(Grocery:식료품점) 운영하며 살았다 하고 
지금은 미 동부 어딘가에서 손주 재롱 보아가며 
평화로운 노후를 보낸다 하고 아쉽게도 
내 친구 호태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교수도 의사도 되고 사업도 하고 
성공한 이민생활을 하고 있다니 
불현듯 그 때 호태에게 
딱지도 많이 주고 구슬도 좀 더 줄 걸 후회스럽다 

금숙이 누나는 
결국 온 집안 식구의 등불이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던 금숙이 누나의 얼굴에 박힌 1963년은 
내 기억 속의 빛바랜 등불로 깜박이고 있다  
난 아직도 한강다리 노량진역을 배회하고 있다


(박산 시집 '노량진 극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