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거
한 끼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거 -
- 박 선생, 그간 너무 격조했어요,
밥 날짜 잡읍시다
일흔일곱 나이에도 살짝 머릿기름을 바르고
은은한 군청색 재킷에 목을 덮는 셔츠를 입고는
갈색 헌팅캡을 쓴 J형을
탑골공원에서 만나 인근 중식당을 갔습니다.
나름 청요리에 '입맛 살아 있다' 할 정도인 나였지만
그의 앞에서는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1980년대 일본 종합상사 상사원으로 만난 오랜 인연으로
당시 한국 중소기업 상사원이었던 내게 그는,
거래처 담당자 관계를 뛰어넘는 스승이랄까?
유럽 캐나다 도쿄 근무를 두루두루 했던 세계인으로서 그의 세련된 International Manner,
즉 상담 대화 방법 등의 영업 스킬도 배웠지만 서로 술을 즐긴다는 공통분모로 잦은 술자리
를 통해, 특히 편견 없는 International Mouth를 지닌 그의 식사 에티켓을 눈여겨보며 새겨 배웠습니다.
그의 눈은 대화와 술 마심에도 항시 상대방을 편한 눈으로 정면 주시했었고
당시 건설 현장이 많았던 중동 사람들과의 식사 예절에서도 그들의 문화 존중이 그랬고,
각각의 나라 별로 특징 지어지는 음식에 대한 유연함 등이 또한 그랬습니다.
국내 영업 출신으로 신출내기 상사원이 된 어설픈 내가 식사 도중 접시를 겹쳐 놓았다든가
포크 나이프를 순서 없이 사용했으면
만찬이 끝난 후 이를 지적해 주었고
튀는 넥타이 색깔 역시 내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조언했었지요.
- (나이에 비해 얼굴색 좋다고 듣기 좋은 칭찬 끝에)
박 선생, 오늘 요리 뭐가 좋으신가?
- 가지볶음 이즘 자주 먹는데 형님은 어떠세요?
유산슬에 중식은 그래도 탕수육은 먹어야 한다며 小자 하나를 추가했고
고량주 선택은 한 5분 넘어 진지한 토론을 거쳐
오랜만에 만나서 북경고량주는 너무 헐하고
메뉴판에 있는 우량예는 너무 거하니
무난한 옌타이로 합의했습니다
예전 한국 일본에서 함께 마셨던 술 얘기에 그때 만났던 사람들 얘기까지
뒤늦게 서예를 하고 있다는 얘기 끝에 내 시 몇 편 감상을 장황하리만큼 길고 심도 있게 열혈 독자답게 감상 評을 해 줍니다.
한잔 한잔 권커니 주거니 대여섯 잔을 주고받았음에도 일흔일곱의 나이에 비해 취하지도 않고 꼿꼿하지만 편안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음식을 씹는 그의 태도를 마주하며(주위 이 나이에 빼갈 이리 마시는 분은 안 계십니다)
나도 모르게 예전 그에게 배웠던 자세로 돌아가 허리를 폈습니다.
음식도 소리 안 나게 여전히 품위 있게 씹고
술도 예의 바른 목 넘김으로 상대방을 더 편히 느끼게 배려하고,
순간, 그가 유산슬을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렸습니다,
ㅡ (얼른 새 젓가락을 꺼내 드리며, 문득 그도 이제 손가락 힘이 많이 빠진
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형님, 예전 접대 시 이러면 안 되는 거지요?(농을 쳤습니다)
ㅡ ㅎㅎ 그렇지요!
글치만 어쩌겠어요, 자꾸 손가락 힘도 빠지니
박 시인도 각오하세요!
머지않아 밤이니! (껄껄 웃으면서)
식사 후의 테이블에는 어느 그릇 하나 겹친 게 없었고 수저 역시 흐트러짐이 없어, 오랜만에 貴人을 만나 익숙했던 예의와 정감이 넘치는 한 끼의 밥을 먹은 기분 좋은 자리였습니다.
세일즈맨 출신들은 평생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 밥 한 번 술 한 번 먹고 마셔보면 그의 이력을 얼추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잔을 비우며 J형께 이백의 이 유명한 詩를 술김에 어설픈 중국어로 들려드렸더니 "맞아! 우리가 이제 이 시를 실천하며 살아야지요!, 거문고 대신 문자 소통으로 종종 얼굴 보고 삽시다!" 하며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ㅡ 이백
(산중에서 隱者들이 술을 마시는데)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
(권커니 주거니 마시는데 꽃이 피누나)
일배일배부일배一盃一盃復一盃.
(한 잔 권하고 또 한 잔 권하고)
아취욕면경차거我醉欲眠君且去,
(이보시게! 내가 취해 잠이 오니 어여 가시게나!)
명조유의포금래明朝有意抱琴來.
(내일 아침 술 생각나면 거문고 들고 오시게!)
모처럼 품위 있는 분을 만나 품격있는 酒食을 하니, 잊었던 품위와 품격이 내게 들어 한 며칠은 기분이 좋았습니다.